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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2 07:43

삶이 아름다워 보였던 찰나의 소중함

발없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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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이 드문 영화관에서 심야 영화를 보기 위해 용산행 기차에 올라탔습니다.

 

예매한 제 자리를 찾아 갔는데 어떤 남자분이 대여섯살 정도 돼보이는 여자아이와 함께 어정쩡한 자세로 서 계셨어요. 여기 제 자리인데 본인 자리 맞냐고 물어 보니까 혹시 자리 좀 바꿔주실 수 있냐고 정중하게 되물어 보십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따라 뒤돌아봤더니, 비슷한 또래의 여자분이 몇 줄 뒤 통로석에 앉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계셨어요.

 

‘아, 가족이구나.’

 

상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니 주말 저녁의 기차가 거의 만석이라 연석을 예매하지 못하고 동떨어진 두 자리를 겨우 확보하신 듯 했습니다. 저는 흔쾌히 여자분에게 가서 자리를 바꿔 드렸습니다.

 

사실 창가석을 선호하는 저로서는 여자분이 앉아 계셨던 통로석이 탐탁치 않았으나, 세 가족이 너무 예뻐 보였거든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지라도 아빠, 엄마, 어린 딸이 옹기종기 앉아 편하게 가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진짜 죄송해요. 괜찮으실까요?”

“전 괜찮아요. 가족끼리 같이 앉으시는 게 좋죠!”

 

부부가 연거푸 감사하다고 미소를 지으시는데 두 분 다 인상이 참 선하고 온화해 보였어요. 마치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꾸밈없는 감사와 행복이 묻어 나오는 것 같은 얼굴이랄까.

 

그렇게 바꾼 좌석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는데, 잠시 후 아이가 다가와서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젤리를 수줍게 건넵니다.

 

“어우, 잘 먹을게. 고마워~”

 

저도 모르게 올해 들어 가장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까지 들더라고요. ‘만약 오늘 이 열차에 사고가 난다면 내 목숨을 던져서라도 저 가족만큼은 구해주고 싶다.’

 

누군가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에 대해 회의와 동경을 동시에 갖고 있던 저로서는 3년 전 마지막 연애 실패 후 결혼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이후 여러 이유들이 겹치고 겹쳐 갈수록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현재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산송장처럼 칩거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고통의 터널이 끝날 기미가 도무지 안 보이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이상 없다고 느껴지면, 앞으로 걸음을 옮기길 포기한 채, 고통이 원래부터 나와 한 몸을 이루었던 것 마냥, 거부할 수 없는 내 운명인 것 마냥 체념하게 되죠. <박하사탕>에서처럼 ‘삶이 아름답냐'고 혹 누군가 물어본다면, 대답하는 것 조차 사치로 느껴져 그저 비웃음만 나올 것 같습니다. 화도 눈물도 더이상 나질 않죠. 아니 화내는 것도 우는 것도 부질없게 느껴질 뿐이죠. 불행이 채운 무력감이라는 족쇄에 옴짝달싹 못 하고 사로잡혀 그대로 몸과 마음이 차갑게 얼어붙었기에.

 

<달팽이의 회고록>을 보았습니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내일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를 교조적인 어투로 하기에 기대했던 것 보다 울림은 미약했습니다. ‘지금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이해될지 모른다'는 말 역시 그저 희망 고문으로 느껴지기도 하고요.

 

한 가지 고백하자면, 얼마 전에 목을 매려다가 실패했습니다. 제 아무리 ‘망한 인생'이라 스스로 저주해 봤자 죽음이라는 미지의 영역 앞에서 인간은 두려움이 앞설 뿐입니다. 차마 이 생각을 떨치기 힘들더라고요. ‘아, 하루만 더 살아 봐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또 꾸역꾸역 오늘까지 살아서 우연히 어느 가족을 만났고 그들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에게 가만히 질문을 던졌습니다. 

 

‘삶이 아름답니?'

 

어느덧 열차는 경유역에 도착했습니다. 세 가족은 하차를 위해 제 옆을 지나가며 다시 한번 감사하다고 밝게 인사를 건넵니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꼭 닮은 투명한 눈빛으로 공손하게 꾸벅 인사하길래 아까보다 더 환한 웃음으로 화답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어쩌면, 삶이 아름다울 수도 있겠다’는 답변이 가슴 속에서 슬그머니 솟아올랐습니다. 무슨 인연인지는 모르겠지만 행복해 보이는 타인과 잠깐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 행복은 바이러스처럼 전염되나 봅니다. 마치 한겨울날, 잠시나마 체온을 나누어 꽁꽁 얼어붙은 손을 녹이듯이...

 

20250511_220521.jpg

 

이건, 차마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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