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막.
<브루탈리스트>를 처음 보고 뇌리에 남았던 생각은, '그래서 이 영화의 본질이 무엇일까?'였습니다. 3시간 35분은 아무리 인터미션이 있더라도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제 입장에서는 좀처럼 버티기 힘든 시간인데요. 웬만한 영화 두 편의 러닝타임을 통해 감독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브루탈리즘'이라는 예술적 기조의 가치? '미국식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한 비판? '시오니즘'에 대한 옹호? 풍자? 아니면 단순히 칠흑같은 시대의 탁류에서 살아남은 예술가의 파란만장한 생애? 결국 두 번 관람하고 나서 이 영화는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있는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는데요. 본 글에서는 개인적인 관점에서 세 가지의 키워드로 단락을 나누어 영화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제 1막. 시오니즘
'시오니즘(Zionism)'이란, 성경의 여호와 하나님이 유태 민족에게 약속한 가나안(현재의 팔레스타인) 지역을 되찾고 귀환하여 약 3000년 전의 영화로운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재건하겠다는 종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일종의 '선민사상'입니다. 이러한 선민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성경의 역사를 축약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겠는데요.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로 가족과 함께 가나안땅으로 이주합니다. '네 씨를 통해 민족을 번성케 할 것이며, 이 땅을 그들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아브라함은 100세의 나이에 아내 사라에게서 이삭이란 아들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삭의 족보를 따라 그 아들 야곱에 의해 이스라엘(야곱의 또다른 이름) 민족이 구성됩니다. 여기서 잠시 주목해볼 점은 아브라함의 혈통이 이삭으로 이어진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내 사라가 아닌 시종 하갈을 통해 앞서 얻게 된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는데요. 이스마엘의 족보를 따라 아랍 민족이 구성되며 이것이 이슬람교의 바탕이 됩니다. 즉, 아브라함이라는 한 뿌리에서 유태교와 이슬람교가 동시에 탄생한 것인데요. 이같은 사실 때문에 양 종교는 하나님께 약속 받은 선지자 아브라함이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우기며 수천 년 간 끊임없는 갈등과 전쟁을 벌여 오고 있습니다.
다시 이스라엘 즉 유태 민족의 이야기로 돌아가봅시다. 유태인들은 약 3500년 전 노예 생활을 하던 이집트에서 모세를 따라 탈출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그들 역사의 황금기인 다윗 - 솔로몬 왕으로 이어지는 통일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죠. 허나 솔로몬 왕 시절 정치외교적 목적으로 이교를 받아들이고 숭배하는 죄를 짓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에게 징벌을 받는데요. 바벨론과 앗수르(현재의 이라크, 시리아 영토)를 통해 나라를 잃게 됩니다. 뒤이어 로마 제국, 가장 최근의 영국까지, 유태인들은 오랜 세월 수많은 나라의 식민지가 된 조국을 뒤로한 채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갔죠. 그러다 20세기 중반,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그들의 한 맺힌 역사는 정점을 찍습니다.
따라서 시오니즘은 유태인들에게 있어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확인시켜 주는 사상운동이자 계몽운동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브루탈리스트>는 이같이 유태인들의 정신 깊숙이 뿌리내린 자존심과 설움을 성경 역사를 토대로 이해한다면 보다 깊이가 느껴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에 시오니즘에 대한 옹호와 풍자가 함께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나그네의 삶, 즉 라즐로와 그들 식구의 곤고한 여정을 영화 내내 보여 주며 시오니즘의 정서적 당위성을 옹호하되, 에필로그에서는 예술 작품까지 이러한 민족정신과 연관 짓는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처럼 현재까지도 타민족 점령과 차별을 합리화하는 시오니즘의 배타성과 모순을 넌지시 풍자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약 2000년 전 부터 현재까지 이어져 온 또다른 형태의 시오니즘 즉, 기독교적 선민사상 또한 비판합니다. 그 어원이 명확하진 않으나 '시온'은 예루살렘 지역의 산을 일컫는데요. 나아가 성경을 통해 보면 '하나님이 함께하는 곳'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쓰이며 천국이라는 개념을 내포합니다. 고로 시온은 피상적으로 유태 민족에 국한된 단어가 아닌 것이죠. 이사야서와 같은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서는 시온에 장차 메시아가 출현할 것을 예언하기도 하는데요. 그에 따라 이스라엘 땅에 메시아 예수가 탄생했고, 이를 기점으로 "진정한 선민"은 아브라함의 육적 혈통을 따른 '유태인'이 아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는 "진짜 시온"이 유태인들을 넘어 모든 민족과 인종에게까지 확장되는 것이죠. 이렇게 선민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허나 유태인들은 예수를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이단으로 규정한 채 그들의 손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과오를 범합니다. 그러면서 그 핏값은 자신들과 후손들이 물겠노라 당당히 소리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유태인들에게 양면적 심리를 가질 수 밖에 없는 종교적 근간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 속에서도 이러한 심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요. 카톨릭과 개신교로 대표되는 미국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라즐로는 유능한 건축가 이전에, 구제해야 할 난민이면서 같잖은 선민의식에 젖은 이교도라는 편견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입니다. 고로 라즐로를 동정하면서도 경계하고 꺼립니다. 허나 그 기저에는 결국 그들 또한 자신들이 선택 받은 민족이라는 기독교적 시오니즘이 깔려 있습니다. 미국은 청교도들의 이주로 건국된 나라입니다. 그들은 '땅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의 지시를 명분으로 침략과 약탈을 합리화해 왔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선민의식에 취해 지상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겠다는 이들의 사상이 어찌보면 유태인들의 시오니즘 논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것이죠. 더군다나 이같은 선민사상이 미국식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극중 밴 뷰런 부자의 행태에서 알 수 있듯 교활한 폭력성을 띄게 됩니다. 겉으로는 유태인 예술가의 안목과 능력을 흠모하고 인정하면서도 돈으로 부리는 소모품 혹은 그보다 못한 개와 창녀로 깎아내리며 멸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입니다. 그들에게 유태 민족과 같은 이민자들은 착취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뿐입니다. 자신들 역시 이민자의 후손임을 망각한 모순이 낳은 폭력이죠. 게다가 자본을 확보하기 위해 종교적 규합을 이용하기도 합니다. 평등하고 자유로운 미국, 세계를 밝히는 희망의 등대를 상징하는 '자유의 여신상'과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거꾸로 뒤집힌 채 스크린에 투사되는 각각의 장면이 알파와 오메가를 이루며 그들의 위선을 너무나 절묘하게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화는 시오니즘의 적용 범위를 기독교라는 종교와 미국이라는 나라에까지 확대하여, 그들의 선민의식과 더불어 미국식 자본주의 혹은 아메리카니즘에 일침을 가하는데요. 그렇다고 유태인 민족주의를 대하는 태도와 마찬가지로 마냥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건 아닙니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이자 나르시스트인 '해리슨'과 그 이름만큼이나 아버지를 닮으려고 애쓰는 '해리', 이들 부자와 달리 해리슨의 딸 매기는 친절하고 온화하며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로 묘사됩니다. 라즐로 부부를 어떠한 편견도 없이 예술가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존중하는 일관된 태도를 보입니다. 아마도 해리슨이 그토록 사랑하는 어머니를 투영한 인물이 아닐까 싶은데요. 어머니의 이름 '마가렛'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는 '매기'라는 이름과 밴 뷰런 센터 시공식 때 할머니의 사진을 조신하게 들고 있던 그녀의 모습을 통해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마가렛 또한 해리슨의 독백을 통해 본 바 사생아를 홀로 꿋꿋이 키우며 아들과 주변인들에게 헌신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요. 이처럼 선민의식에 매이지 않고 묵묵히 예수의 가르침과 성품을 따르며 살아가고자 하는 기독교인들 역시 당시 미국 땅에 존재했음을 영화는 이야기합니다.
제 2막. 섹스
혹자에겐 이 영화가 당혹스럽게 느껴지는 지점일 수도 있겠는데요. 다소 뜬금없어 보일 정도로 이 영화에는 섹슈얼 코드가 빈번히 등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섹슈얼 코드들이 극중 라즐로 및 유태인들의 심리와 처지를 상당히 인상적으로 은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아내 에르제벳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사창가에 들락거리는 라즐로의 모습을 포착하는데요. 웬일인지 뒤편에 보이는 일행과 달리 일반적인 성교를 하지않고 여성에게 수음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면서 여성은 '내가 안 예쁘냐'고 자꾸만 물어보는데요. 한 술 더 떠 그의 성향을 의심하며 남자와의 성교를 제안하기까지 합니다. 즉 라즐로는 어떠한 이유로 인해 현재 발기부전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수용소 시절의 육체적 학대 때문인지, 안면부 부상의 진통제로 사용하는 마약 때문인지, 심리적 불안감 때문인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남자로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클럽에서 유혹하는 여자들의 손길도 외면하고 그저 혼자 포르노 영화관에 가서 성적 갈증을 달래는데요.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아내와의 잠자리 또한 그녀의 몸 상태를 핑계로 회피하려 듭니다. 아내가 수음을 해 주지만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던 설움과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복받쳐 눈물을 쏟아 낼 뿐이죠. 영화 내내 그는 사정을 하지 못합니다. 후반부 마약에 취한 아내와의 섹스신조차 그가 정상적인 삽입으로 관계를 가지고 사정에 이르렀는지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동성인 해리슨에게 매춘부 취급을 받으며 강간까지 당하는데요. 이같은 장면들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의 라즐로가 마치 거세 당한 남자의 처지와도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교는 생물학적으로 씨를 뿌리는 행위입니다. 특히 유태 민족에게 있어 씨를 뿌린다는 것은 성스러운 의미를 지닙니다. 앞서 시오니즘 단락에 서술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같이 번성할 것'이라는 언약을 맺었는데요. 이 약속을 받들어 유태인들은 사내 아이에게 행하는 할례(음경의 표피를 벗겨 내는 의식)를 통해 선민으로서 대를 잇는 것에 대한 가치와 전통을 지켜 왔습니다. 따라서 유태인인 라즐로가 미국 땅에서 씨를 뿌리지 못한다는 설정은 수용소 감금과 탈출, 망명을 거치며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개인의 상황과 더불어 미국 사회에 정착하여 생육, 번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당시 유태인들의 심리를 함축하는 메타포라 봅니다. 아울러 남성으로서의 성기능 장애는 남자의 씨를 받는 여자와 결합하여 후손을 생산하는 이치처럼, 예술적 영감을 뒷받침해 줄 자본과 결합하여 건축물을 창조해야 하는 그가 현재 예술가로서도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없는 입장임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즉 이 영화에서 섹스는 라즐로의 생물학적, 민족적, 예술적 정체성의 위기를 동시에 묘사하는 긴요한 장치로 기능합니다.
결국 해리슨에게 당한 성적 치욕을 아내에게 고백한 라즐로는 썩어빠진 미국을 떠나 이스라엘로 돌아가자는 그녀의 간청에 울먹이며 승낙합니다. 이후 생략된 서사 때문에 그가 언제 이스라엘에 돌아갔는지, 그의 성적 능력이 회복되었는지 확실히 알 순 없지만 그들 부부에게 자녀가 없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평생 육체적 고통과 성적 결함을 떠안고 살아야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브루탈리스트> 속 성적 이미지들은 도파민을 자극하기는 커녕 가슴 한 켠에 서글픔이 고이게 만들 뿐입니다.
제 3막. 수미상관
첫 관람 후 가장 강하게 들었던 의문은 '도대체 왜 수미상관의 구조여야만 했을까?'였습니다.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하는 인물은 주인공 라즐로가 아니라 그의 조카인 조피아인데요. 이 영화의 흥미로운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유태인 건축가 라즐로의 기나긴 서사를 통해 고난과 상처 속에 탄생하는 그의 작품을 조명하고 있지만, 결국 에필로그의 건축 비엔날레 시퀀스에서 작품을 창작한 이가 아닌 '해석'하는 이의 시선으로 영화가 마무리된다는 사실 말입니다. 즉 라즐로의 삶을 따라가는 표면적인 스토리텔링 이면에 가려진 조피아의 삶까지 되짚어 보아야 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습니다.
작중에서 조피아는 실어증에 걸린 것으로 보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외삼촌 부부의 손에서 자란 그녀의 삶 또한 라즐로 못지않게 기구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외삼촌과 생이별 후 강제 수용소에 갇혀 외숙모와 함께 온갖 수치와 핍박, 죽을 고비를 견뎌 내고 마침내 기회의 땅으로 이주한 그녀는 이민자들 앞에 놓인 또다른 장벽들과 마주합니다. 이민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편견과 차별은 물론이고 젊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기차에서의 탈출 때 코가 부러지고 술과 마약에 중독된 라즐로, 영양실조로 골다공증에 걸려 걸을 수 없는 에르제벳, 그리고 말을 잃어버린 자신까지, 세 식구는 홀로코스트가 그들에게 남긴 육체적 고통으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서로를 지탱합니다. 고로 이들은 흔들릴지언정 쓰러지지 않습니다. 고통을 예술적 집념으로 승화시킨 외삼촌,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로 승화시킨 외숙모를 바라보며 그녀 또한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침묵 속에서 절규했을 것입니다. 창작자 라즐로에겐 시대도, 전쟁도, (정치 및 종교적)이념도, 그 어떤 격랑에도 결코 침식되지 않는 예술적 집념을 투영한 결과물이 바로 '밴 뷰런 커뮤니티 센터'인데요. 조피아는 그런 외삼촌의 작품에 자기자신을 투영합니다. 유태인으로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깊이 새기고 고고하게 지켜 왔던 그녀의 인생을 말입니다. 아마 그녀는 밴 뷰런 센터의 콘크리트 내벽에서 자유를 앗아갔던 다하우 수용소 내벽의 싸늘한 기운을 느꼈을 것이며, 드높은 천장의 창에서 협소한 수용소의 쇠창살 틈으로 가까스로 새어들던 한 줄기 희망의 빛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한 많은 세월에 대한 보상 심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는 자부심, 나아가 자신에게는 엄마와 다름없었던 외숙모를 향한 그리움의 감정을 투영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외삼촌의 작품에 말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겐 달갑지 않은 이교도, 자본주의 파시스트들에겐 소모품, 다른 건축가들에겐 괴짜로 보여졌을지라도 조피아에게만큼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었던 자랑스러운 민족의 예술가이자 든든한 가장이 바로 라즐로였을테니까요. 그리하여 조피아는 대중 앞에서 이제 말을 할 수 없는 외삼촌의 관점 그대로 대변하는 대신 시오니스트 관점에서의 자의적 해석을 택합니다. 코멘트를 마친 그녀의 흐뭇한 얼굴에서 수용소 해방 직후의 상기된 얼굴이 디졸브된 채 영화의 막이 내리는데요. 오프닝에서 심문을 받던 조피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어디로 가고 싶냐는 질문에 무슨 답변을 하고 싶었을까요? 감독은 이같은 수미상관 구조를 통해 마치 조피아가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으로 치환되는 듯한 영화적 마법을 선사합니다.
결국 감독은 영화의 끝자락에서 '예술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관객 앞에 펼쳐놓습니다. '아름다움의 견고한 본질'을 꾸밈없이 드러내며,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끔 건축물을 창조하는 것이 바로 '브루탈리즘'의 기조인데요. 이러한 창작의 순수성과 대치되며 충돌하는 해석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질문이 이 영화의 "진짜 화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예술 작품이 관람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판단되고 해석된다면, 그것은 본질의 왜곡인가? 아니면 그 또한 예술의 본질인가? 묻고 있습니다. 모든 예술 작품은 창작자로부터 출발하여 관람자에게 도착합니다. 그리고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각양각색의 빛을 띄게 되죠. 관람자의 연령, 성별, 배경, 성향, 가치관 등에 의해 예술 작품의 의미가 부여되며 값어치가 책정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는 '과정보다 목적지가 중요하다'는 말과도 묘하게 일맥상통하는데요. 고로 창작자만이 예술의 주체라고 볼 순 없으며, 관람자의 해석이 곧 예술의 완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반부 밴 뷰런 센터의 시공을 의뢰받기 전 라즐로의 꿈에, 말쑥한 조피아의 모습과 함께 에필로그와 오버랩되는 내레이션이 등장하는데요. 흡사 예지몽처럼, 먼 훗날 라즐로의 미완성작이 조피아의 해석으로 비로소 완성될 것에 대한 복선이라 봅니다. 또 모르는 일이죠. 조피아의 해석 덕분에 그 날 그 자리에 참석한 누군가에겐 라즐로의 건축물이 더 큰 의미와 감동으로 다가오고 기억될지도요. 그러니 설령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른 곡해라 할지라도 어찌 그녀에게 돌을 던지겠습니까? 예술 작품은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공통된 정답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이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을.
에필로그.
결론적으로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장대한 서사극의 외피를 영화적으로 풍성하게 두르고 창작과 해석의 관계에 대한 원론적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굉장히 독창적이고 야심만만한 작품입니다. 이 영화가 그저 격동의 20세기를 걸어 온 한 인물의 발자취와 인생관을 긴 호흡으로 그려 낸 전기 형식의 영화에 머물렀다면 개인적으로 훌륭한 시네마라고 인정하긴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와 유사한 레퍼토리들은 이미 거장들의 손에서 수많은 명작으로 탄생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감독은 꽤 많은 주제를 건드리며 늘어놓는 듯 하지만, 사실상 그 모든 것들이 결국 영화 <브루탈리스트>라는 거대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다양한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미학적 관점들을 이끌어 내며 포용하기 위한 장치로 활용됩니다. 가령 시오니즘에 대한 창작자 본인의 뚜렷한 관점을 내세우기보다는 그 찬반 여부에 대한 판단과 해석의 몫까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 일임하는 것이죠. 게다가 긴 러닝타임 가운데 서사적 공백들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어 관객이 이야기에 개입할 여지를 마련합니다. 이같은 이유들로 인해, 마치 웅장하고 견고한 건축물 내부에 텅 빈 적막이 감도는 것 같은 역설적인 느낌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영화를 보고 나면 웬지 감독의 스탠스가 애매하게 느껴지며 감상과 해석의 결과가 천차만별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영화는, 서두에 언급한대로 시종일관 모든 것을 말하지만 끝내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서막의 조피아처럼, 에필로그의 라즐로처럼 말입니다.
무엇이든 짧을수록 미덕인 세태를 거스르는 이 영화가, '21세기에 소환된 클래식 필름'이라는 미학적 가치로 후대에 기억될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최소한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던 20세기 서사극의 거장들에게 명함을 내밀 만한, 그들 앞에 자신의 영화적 야망과 역량을 증명해 낸, 감독 '브래디 코베'의 이름만큼은 많은 이들의 뇌리에 각인될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는 좋은 답을 주며 느낌표를 찍지만, 그 이상의 영화는 좋은 질문을 남기며 물음표를 그립니다. 이 영화 <브루탈리스트>가 그러합니다.
<브루탈리스트> 별점 / 한줄평
☆4.0
예술 작품이 관람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판단되고 해석된다면, 그것은 '왜곡'일까? 그 또한 예술의 '본질'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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