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서로에게로 도피하고 있어. 서로가 두렵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들은 왜 불안한 걸까?
그들은 한 번도 자신을 안 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거야."
헤르만 헤세, 『데미안』
헤르만 헤세는 『데미안』에서 1차 세계대전 발발 전 유럽사회에 퍼진 심리적 병폐들을 이처럼 진단했다. '아름다운 시절'이라 불린 벨 에포크는 유럽 평화의 전성기였지만, 물질적 풍요는 역설적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앗아갔다. 자본주의는 부를 빠르게 축적시켰지만 더 많은 시장과 투자를 요구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대량생산체계가 등장한 배경이 되었다. 사람들은 일자리가 있는 도시 공장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은 마치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취급받았다. 사람들은 깊은 정신적 소외감을 느꼈다. 헤세가 말한 "자신을 모르는 불안"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불만과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민족주의와 전쟁 미화가 대두되었다. 이는 공허를 느끼는 사람들에게 "조국을 위한 영웅"이라는 낭만적 서사를 제공하였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이 전쟁에 열광한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모험심 때문이 아니었다. 기술혁명의 전환점에서 오는 자기 불안과 대량생산체계가 강요하는 권태에서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산업화가 촉발시킨 거대한 세계대전에서 기계문명이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오프닝에서 들리는 저음의 기계적 사운드는 당시 시대배경과 동떨어진 전자음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런 시대적 부조화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의도적인 기계적 사운드는 인간과 비인간적 속성의 충돌로 조성되는 불안감과 긴장감으로 읽힌다.
2. 공장의 논리
<서부전선 이상없다>의 핵심 메타포는 대량생산공정이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을 단순한 국가 간 분쟁이 아닌, 산업문명이 인간을 소모품으로 전락시킨 거대한 공장처럼 그려낸다.
영화는 교묘하게 대량생산공정을 대표하는 두 개의 동적 이미지를 전쟁에 투영한다. 그것은 순환과 분절의 컨베이어벨트와 강력한 힘으로 찍어 누르는 프레스 가공이다. 이 두 메커니즘이 1차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묘사하는 핵심 장치가 된다.
3. 컨베이어벨트
첫 번째 은유는 컨베이어벨트다. 영화는 오프닝부터 이 순환구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전사한 군인의 군복이 수거되고, 기존 명찰이 제거되고, 새로운 병사에게 지급된다. 마치 공장에서 폐기품을 회수해 재가공하는 것처럼 말이다.
헤세의 말처럼 자신을 잃은 개인들은 산업화된 사회의 권태와 소외감에 지쳐 도피처로써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은 그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산업적 논리로 수행되는 전쟁이다. 국가의 프로파간다는 그들을 헤라클레스나 테세우스 같은 고대 영웅처럼 낭만적으로 부추겼지만, 전장에서 개인의 뛰어난 신체적 기량이나 초인적 면모는 더 이상 무의미했다. 1차 세계대전은 런던에서 시작됐던 만국박람회의 파괴적 변주처럼, 열강들의 산업적 역량이 주무대인 장이었다.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물량, 더 강한 화력이었다.
프로파간다에 현혹되어 입대한 청년들은 미싱기에서 대량생산된 군복을 입고, 훈련을 받아 표준화된 병사들로 개조되어 전장에 투입된다. 그리고 한 뼘의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지휘관의 돌격명령 한마디에 전진하다가 총탄이나 독가스로 피를 쏟아내며 죽고 만다. 주검이 된 그들로부터 군복은 다시 수거되어, 막 입대하게 된 어린 병사에게 배급된다.
이것이 바로 컨베이어벨트의 운동성이다. 효율성을 위한 표준화, 대량생산, 그리고 끝없는 순환. 인간은 이 시스템의 부품처럼 소모될 뿐이다.
4. 프레스 가공
두 번째 은유는 프레스 가공이다. 컨베이어벨트의 운동성이 현대전쟁의 수행과정을 거시적으로 설명한다면, 프레스 가공은 전쟁의 파괴적인 속성과 양상을 미시적으로 묘사한다. 영화에서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탱크의 등장이다.
1차 세계대전의 참호전은 철조망과 기관총으로 인해 끔찍한 교착상태에 빠져있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탱크였다. 지축을 울리는 소음과 함께 나타나 총탄과 진흙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하는 이 철갑 괴물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공포 그 자체였다. 탱크 앞에 혼비백산한 병사들은 앞다투어 도망치려 했지만 참호의 좁은 통로와 시체가 뒤섞인 진흙뻘밭은 그들의 발을 묶어놓았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는 불행한 한 병사가 자신을 덮치는 탱크에 깔려 죽는 모습이다. 짧은 순간, 무한궤도에 깔린 병사는 발가락부터 머리까지 차례로 뼈와 살이 으깨지며 터져 나간다. 그는 고통에 찬 비명은 지르지만 곧 탱크의 요란한 엔진 소음에 묻힌다. 거대한 기계적 힘이 인간을 단번에 압착시켜 버리는 이 장면은 마치 프레스 가공의 메커니즘을 보여주는 듯하다. 프레스 공정이 압착기에 가공품들을 수도 없이 찍어내 버리듯, 탱크는 참호전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만들어냈다.
5. 손익보고
여타 전쟁영화가 아군과 적군의 갈등을 그리는 것과는 달리,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전장 속의 적군조차 피를 토하며 고통받는 인간으로 그려낸다. 그들 역시 이 거대한 시스템의 희생양일 뿐이다.
<서부전선 이상없다>라는 영화의 제목은 이런 전쟁의 비인간적 면모를 암시한다. 전선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어가지만 이를 '이상 없다'라고 얘기한다. 전쟁은 분쇄기처럼 갈려나간 인간의 개별성을 그저 숫자로 환산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시스템이 계속 돌아가는 것뿐이다. 이는 마치 산업 문명의 핵심 논리처럼 보인다. 기계가 고장 나도 부품을 교체하면 그만이듯, 전쟁도 전사자가 발생하면 그 자리를 새로운 병사로 교체하면 그만이다. 인간 개인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기계적 효율성이 본 작품의 진정한 적이다.
6. 기대효과
최근 몇 년 사이, 샘 멘데스의 <1917>이나 인기 비디오게임 <배틀필드 1>처럼 1차 세계대전을 소재로 한 미디어믹스가 유행했었다. <서부전선 이상없다>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전쟁 장르에서 한동안 잘 다뤄지지 않았던 1차 세계대전이 유행했던 것은 단순히 2차 세계대전이나 현대전에 대한 피로감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현재 시대적 변환과 조류에서 어떤 요구에 의해 다시 1차 세계대전을 환기할 필요 때문은 아니었을까?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인간과 그 이후의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다. 한 때, 전쟁 이전 '아름다운 시절'에는 이성이 인간을 진보하게 만들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그 믿음을 끝내버리고 말았다. 이성과 지식 문명의 꽃이라 생각했던 산업화는 도리어 인간을 소외시키고 정체성을 앗아갔다. 공허함을 메우려 사람들은 집단의 열광 속으로 도피했지만 그 집단적 열광이 이끈 전쟁은 결국 더욱 극단적인 산업 논리로 인간을 파괴했다. 소외에서 시작되어 파괴로 귀결된 완벽한 악순환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너도나도 A.I. 같은 기술적 혁명이 인간의 생활과 문명들을 한 단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와 희망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한 풍경에서 왠지 모르게 100여 년 전 산업문명으로 '아름다운 시절'을 꿈꿨던 기시감이 느껴진다. 지금 우리는 과연 헤세가 진단했던, 소외된 개인들이 '패거리 짓기'로 도피했던 그 악순환에서 벗어난 것이 맞을까? 어쩌면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과거에 벌어진 끔찍한 기억이 아니라, 곧 다시 찾아올 수도 있는 광경이자 불안일지도 모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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