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베이커 감독의 2017년작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동명의 2002년작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디즈니의 신작 <릴로 & 스티치>. 이 두 영화는 얼핏 결이 전혀 다른 듯 보이지만 나란히 놓고 보면 비슷한 점이 꽤 많으며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코 녹록치 않은 외로운 인생살이, 타인의 체온에 기대어 "행복"을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 과정에서 혈연보다 더 애틋한 인연들과 일종의 "대안 가족"을 이룹니다. 그 중심에는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응시하며 당차게 행복을 외치는 귀여운 소녀들이 있습니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무니의 가족은 미국 플로리다주에 위치한 디즈니 월드 근처의 한 싸구려 모텔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주인공 무니는 이 모텔에서 꽤 오랫동안 거주한 터줏대감이죠. 변변한 직장이 없는 엄마와 함께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겨우겨우 방세를 내며,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 친구가 몰래 빼돌리는 공짜 와플로 끼니를 이어갑니다. 소녀에겐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들 역시 무니와 마찬가지로 미혼모의 자녀들이며 집도 없이 모텔에 가까스로 뿌리를 내린 채 살아갑니다. 그래도 소녀는 삶이 즐겁습니다. '매직 캐슬'이라는 모텔 이름만큼이나 이곳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이죠. 어쩌면 어린이들에게 있어 꿈과 마법의 세상인 디즈니월드보다 더. 범퍼카를 타는 대신 친구들과 함께 주차된 차에 침을 뱉고, 유령의 집에 가는 대신 폐가에 몰래 들어가 불을 지르고,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으면 돈 많은 관광객들의 인심을 공략해 친구들과 알뜰살뜰 나눠 먹고, 사파리 대신 풀밭의 소들을 코 앞에서 구경하고, 친구의 생일날 디즈니 월드는 함께 못 갈지라도 그곳으로부터 밤하늘에 쏘아 올려져 장관을 이루는 불꽃놀이를 만끽하며 진심으로 축하해 줍니다. 이처럼 소녀의 세상은 행복할 거리들로 넘치죠. 기실 현실은 시궁창일 뿐이라고 정색하기도 무안할 정도로 말입니다. 쓰러진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소녀는 친구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 나무를 왜 좋아하는지 알아? 쓰러졌어도 계속 자라잖아."
이 말 한 마디에 이 영화의 희노애락이 모두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게 인생이야. 네가 지금 불행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계속 살아갈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중간에 쓸모 없는 나무라 평가받아 잘리고 버려질 수도 있겠지만, 혹시 아니? 그러다 담장 너머 디즈니 월드까지 뻗어 갈 수 있을지. 그렇게 네게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날지.'
감독은 소녀가 처한 현실을 때론 냉정하게 여과 없이, 때론 따스하게 감싸며 보여주되 섣불리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섣불리 소녀의 행복도 불행도 속단하지 않은 채, 다만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만 읊조립니다. 소녀의 엄마를 비롯해 소녀의 세상에 속한 모든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고 도움이 되고 싶지만, 필경 자신도 행복하다고 자신할 처지가 못되기에 안타까움을 꾹꾹 누른 채 담배만 뻐끔거리며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바비 아저씨의 복잡하면서도 투명한 눈빛처럼 말입니다. 고로 이 영화의 결을 MBTI에 대입하자면 '선의의 옹호자'인 INFJ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반면 <릴로 & 스티치>는 '재기발랄한 활동가'인 ENFP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디즈니 특유의 해피 바이러스로 가득합니다. (영화 전체가 ADHD 같긴 하지만).
'인생은 무조건 행복해야 해. 불행 따윈 개나 줘버려. 다 잘될 거야. 아자아자!'
부모님을 여의고 언니와 함께 하와이에서 살아가는 릴로는 친구가 없어 외롭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물고기, 닭, 개와 같은 동물 친구들과 시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하죠. 그래도 소녀는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즐깁니다. 플로리다의 무니와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별똥별을 보며 소원을 빕니다. 천사 같이 착한 친구를 보내 달라고. 그렇게 별똥별처럼 하늘에서 떨어져 강아지 코스프레하는 초능력 외계인을 만납니다. 그리고 둘은 '우주'와 '하와이'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세상이 부딪히고 하나로 뭉쳐지듯 시끌벅적하게 그들만의 우정을 만들어 갑니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한 존재가 되는 거야. 넌 내게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특별한 존재가 될 거야.'
생택쥐페리의 유명한 소설 <어린 왕자>의 명대사처럼, 소녀와 외계인은 서로에게 길들여져 갑니다. 행복을 향해 손을 맞잡고 달려갑니다. 아니 날아갑니다. 마치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그마저도 오직 짜릿한 행복의 결말을 위해 빈틈없이 세팅된 과정인 것처럼.
이같이 두 영화는 현실의 그림자에 놓였지만 영혼만은 빛을 잃지 않은 소녀들이 타인과 우정을 나누며 또한 가족을 이루며 행복을 쫓아가는 그 종종걸음을, 같은 듯 다른 톤으로 그려 냅니다. 마치 ENFP와 INFJ에서 가운데 글자 두 개는 같고 나머지 글자 두 개는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소녀들의 행복을 가로막는 공통적인 장애물은 정부 복지 기관입니다. "보호"라는 명목으로 이들이 소중히 여기는 존재들로부터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하죠. 두 소녀는 이에 순순히 응하지 않습니다. 그들 옆에는 핏줄인 엄마와 언니는 물론, 서로에게 길들여져 가족만큼의 특별한 존재가 된 잰시와 스티치도 있죠. 무니와 릴로는 이러한 가족들과 함께 영위할 행복을 위해 당당히 맞섭니다.
“가족은 누구도 혼자 남겨져선 안돼.”
<릴로 & 스티치>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대사처럼 두 소녀가 추구하는 바는 간단명료합니다. 소중한 이들과 어떻게든 함께해야 하며 이것을 방해한다면 지구고 외계고 다 덤비라는 것이죠. 보다 현실적인 무니의 이야기에 비해 릴로의 이야기에서는 모든 방해 요소들이 램프의 요정 지니가 와서 마법이라도 부린 양 우수수 떨어져 나갑니다. 그렇게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습니다.
‘이래도 안 행복할거야? 응?’
원작 애니메이션도 보지 않았고, 그래서 하와이의 그림 같은 정취와 외계 생명체들의 우스꽝스러운 비주얼이 한 스크린에 공존하는 것만으로도 영화 내내 이질감을 느꼈던 저조차, 뻔뻔스러울 정도로 긍정적인 영화의 기세와 경탄스러울 정도로 행복한 영화의 결말에 씨익 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속으로 외쳤습니다.
'그래, 이게 디즈니지!'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또 다른 의미에서 똑같은 외침을 이끌어 냅니다. 소녀의 궁상맞은 "매직 캐슬"과는 도무지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가깝지만 너무도 멀었던 그 웅장한 "매직 캐슬"이 소녀의 뒷모습을 걸고 찍은 샷으로 엔딩에서 마침내 제 눈 앞에 펼쳐질 때, 실로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작은 탄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 <아노라>만 보고서 감독 션 베이커를 평가절하했던 제 자신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날렸습니다.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은 이 영화로 받았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모처럼 영화로 인한 황홀감에 흠뻑 취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 <괴물>, 찰리 채플린의 <키드>같은 명작들의 정서가 묻어나는데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고전 <400번의 구타>를 떠올리게 하는 엔딩 시퀀스까지... 간혹 이런 주옥 같은 영화를 우연스럽게 만나며 찬사를 보내기 위해서라도, 앞서 말한 영화의 대사처럼 쓰러진 인생일지언정 계속해서 살아가야 하나 봅니다.
'내가 가는 길이 험하고 멀지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때론 지루하고 외로운 길이라도 그대 함께 간다면 좋겠네.'
제가 좋아하는 노래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의 가사 중 일부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르다는 이유로 양극화되어 서로를 손가락질하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내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것 만큼 크나큰 행복은 없습니다. 저 차갑게 서 있는 현실의 벽 앞에서 그것이 설령 사치일지라도 벽 너머의 무지개를 붙잡으려 손을 뻗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겠죠.
2025년 여름의 문턱에 다다른 지금의 우리에게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목소리로 "같이"의 "가치"를 전하는 두 영화. 영화가 주는 행복감에 잠시나마 심신을 맡기며 다시금 먼 길을 걸어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마 우리가 영화를 끊임없이 사랑하고 영화관을 찾는 이유일 것입니다. 무니와 릴로에게 "디즈니 월드"가 있듯 우리에겐 "시네마 천국"이 있으니까요.
<플로리다 프로젝트> 별점 / 한줄평
☆5.0
이렇게 "시네마"라는 "매직"은 우리 눈 앞에 무지개를 수놓아 펼쳐 낸다.
<릴로 & 스티치> 별점 / 한줄평
☆3.0
우당탕탕 왁자지껄 모두가 행복해야만 하는 디즈니 가족 영화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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